[M25]사진은 내 영혼이다. 자유주의자 김중만
사진은 내 영혼이다. 자유주의자 김중만
 
 



"사진은 내   영혼이다."


본인은 가벼운 작가라 했지만 정작 그는 진중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말하며 혹여 오해가 있진 않을까 재차 설명을 더하는 모습은 세심했다. 어떤 이는 최고의 상업 작가라 했고 또 다른 이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 했지만 그는 “이제 그 모든 걸 잊어달라”며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에디터 안재형  포토그래퍼 김영준



트렌드세터들이 모여 있다는 강남, 그 중심부인 청담동의 한 건물 2층에 사진작가 김중만의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있다. 입구 한켠에 손바닥만한 현판이 있을 뿐, 겉모습은 일반 사무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별천지가 펼쳐진다. 스튜디오 중심에 커다란 나무가 팔을 벌리고 있고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민속공예품이 시간과 공간의 가늠을 어렵게 한다. 얼룩말 가죽이 깔려있는 바닥, 의자가 된 코끼리 다리, 그 위를 쉼 없이 날아다니며 재잘거리는 앵무새 무리들. 문 밖을 채운 첨단의 무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튜디오는 아이러니하게도 첨단을 선도하는 사진의 메카였다. 패션, 광고, 영화  포스터, 수많은 스타들이 이곳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났고 그 사실은 지금도 유효하다. 땋아 내린 레게 머리를 하고 느긋한 손놀림으로 인도 향을 피운 김중만은 커다란 스피커가 달린 오디오에 젊은이들에게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의 OST를 걸었다. ‘언젠가~’ ‘한때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듯, 요즘 그는 지금까지의 작가 생활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2006년 11월, 돌연 순수로의 회귀를 선언하더니 휴대전화를 없앴고 밀려드는 광고 작업을 스스로 정리했다. 그러고는 아프리카와 히말라야로 훌쩍 몸을 던졌다. 그 누구보다 대중의 인지도가 높았던 사진작가의 일탈(?)에 매스컴은 의아해했지만, 그는 꿋꿋하게 그곳의 풍경을 담아냈다. 때마침 작년 11월 뉴욕에서 열린 ‘아시안 컨템퍼러리 아트 페어’는 1년 동안 순수를 고집했던 그의 열정에 환호한다. 참여 작품의 판매가 전반적으로 저조했지만 김중만의 이름이 선명한 한복 사진이 7점이나 팔려 나간 것이다. 이른바 빅히트였다. 우리 나이로 쉰다섯, 정부 파견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이주한 16살, 홀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사춘기, 1988년 한국 국적을 회복하기 전까지 두 차례 국외 추방과 마약, 두 번의 이혼으로 구설에 올랐던 혼란기…. 평범한 길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여전히 쭉 뻗은 아스팔트를 마다하고 좁고 굽은 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올해는 세계 제2봉이라는 K2에 오를 예정이다.


원래 언더그라운드, 아웃사이더다
  

외모에 별 변화가 없다. 레게 머리 스타일도 꽤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고.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많이 달라졌지.(웃음) 5년 전에 이 머리를 했는데 사실 잘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게 좋기도 하지만 싫기도 하고.

알려지는 게 싫다? 대중의 인지도가 가장 높은 사진작가로 평가받는데.
매체 인터뷰도 여과 없이 응하곤 했는데 어느 날 내가 하는 일을 많은 분들이 알고 있다는 게 싫어졌다. 자꾸 흥미 위주가 되는 것 같고. 같이 작업했던 연예인들처럼 비춰지는 게 진정 사진가의 길인가,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그래서 정리했지. 작업에만 열중한 지 1년쯤 됐다. 좀 더 작가로서 정진하고 다른 길을 걸으면서 치열한 싸움을 하려고 한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사진가의 길은 어떤 길인가?
분명 지금까지의 길과는 다르다. 순수 작업이고 철저하게 돈과는 상관없는 작업이다. 그동안에도 돈이 되는 사진만 고집하진 않았다. 생활을 위한 부분을 제하고 나머지는 내 사진을 찍었는데 이젠 그것까지도 걸러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잘라 내야지.

최고라는 자부심이 순수 작업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그렇진 않다. 아직은 큰 시장에서 작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 낸 수식어가 최고란 것이고. 내가 최고니까 이젠 다른 길을 걸어야겠다? 음…  한두 번, 술을 마시거나 감기약을 먹고 비몽사몽일 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겠지.(웃음) 

하지만 요즘은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업은 상업이고 순수는 순수다. 경계가 모호하다면 내가 순수 사진을 고집한다 해도 많은 개런티에 광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는 안 된다. 그건 절제에 관한 문제고 자기가 가고자 하는 철학의 개념이다. 난 그게 옳다고 믿는다. 물론 약간 고행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예술이 100% 고행은 아니지 않나. 즐거움이 있고 그 즐거움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나 제도, 고정관념과 타협하지 않는 생각이 있어야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것을 줄 수 있다. 똑같이 행동하면서 뭘 얻고 뭘 주겠어.

그래서인지 대중은 당신의 행보에 자유로운 삶을 떠올린다.
그런 부분이 대중에게 어필됐다면 사진가로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사진이 대중화됐다는 얘기니까. 사실 우리 문화의 영역을 놓고 보면 사진가의 영역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는 분들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문화였지. 2000년대에 들어와서 달라졌다. 그건 나 때문이 아니고 세계적인 추세다.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전혀. 난 그 모든 것에서 빠지고 싶다. 원래 언더그라운드와 아웃사이더를 좋아한다.(웃음) 가운데에서 뭘 하는 것보다 남들보다 좀 뒤에서 가운데를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지. 나서는 건 별로…. 복장이나 외형이 그렇다 보니 이 사람 좀 튀는구나 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실제로 내가 그렇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중심이 아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고 예우해 주고 인정해 주는 건 고마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재미없다. 나를 몰라주는 게… 묵묵히 가야 할 길이 있는데, 혼자 그 길을 걷는 게 더 재밌다.



난 굉장히 가벼운 작가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1979년에 귀국했는데, 그때와 지금의 분위기는 어떻게 다른가.
30년 세월이 지났는데 군부와 독재, 민주의 혼란을 짧은 시간에 정리했고 굉장한 경제적 성장, 대중 예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의 DNA가 정말 우수하달 수밖에. 이런 부침에도 불구하고 세계 15위의 국민생산력을 갖고 있다. 절대 훌륭한 누군가 때문이 아니다. 전반적인 잠재력과 가능성, 포지티브한 의지들이 대단한 것이지. 물론 지금이야 잘 먹고 잘 살다보니 분배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 허나 해결되지 않겠어.

굉장히 희망적이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경쟁이 우리에게 한 가지 이상의 발전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니까. 또 하나, 우린 남을 죽이는 민족이 아니니까. 서구적인 경쟁은 남을 죽이지 않나. 유럽의 왕정과 민주주의의 역사는 비열하기 짝이 없거든. 우리는 그렇게 야박한 민족이 아니니까. 웬만하면 구치소에 안 보내고 뉘우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현명한 민족 아닌가.

하지만 당신의 개인사에 있어서는 야박할 수도 있을 텐데. 귀국 후, 외국 국적이란 이유로 두 번이나 추방당했다.
그건 시대적인 사고의 차이다. 처음 내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대한민국에서 귀고리 한 남자는 나 하나였다. 사회적으로 볼 때 비합리적인 비주얼이지.(웃음) 때가 아닌데 감히 어딜. 그냥 그 정도였다. 우리와 다르니 ‘떼어놔라’였지 ‘죽여라’는 아니었으니까. 추방시키고 ‘딴 데 가서 살아라’였으니까.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라 불리는 30대 초반이었다. 그냥 아무 불만도 없었다고
내 20~30대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방황과 혼돈, 혼란의 시기였다. 다행히 지나고 나니까 무엇보다 내 나라에 고마운 게 내 멋대로 살았음에도 날 봐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덕분에 좋은 작가가 되어 사회에 기여한다면 좋겠구나란 생각을 갖게 해줬다.

젊은 혈기에 자신을 알아주는 곳에서 작가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돌아온 이유가 뭔가.
오기도 있었지.(웃음)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 정도는 아닌데, 내 스스로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냥 “그래 니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 독재, 인권유린, 다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해서 복수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난 그런 식의 허상과 철학엔 관심이 없다. 난 굉장히 가벼운 작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망이나 소명을 갖고 시대적인 판단을 하는 건 내 몫이 아닌 것 같다.

시대에 따라 한국에서 사진작가로 산다는 게 많이 다르겠다.
사실 처음에는 경쟁이 없었거든.(웃음) 지금은 굉장하다. 사진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늘어났다.

사진이 생활화된 시대인데, 본인을 찍기도 하나.
찍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난 어떻게 찍으면 잘 나오는지 알고 있거든, 그러니 어떻게 찍히는 게 잘 나오는지도 알고 있고. 이미 알고 있는 걸 뭘 또 써 먹어.(웃음) 가족사진도 안 찍는다. 우스운 얘기지만 사진의 영역은 내겐 순례자의 길이다. 막 하진 않는다.

30년 동안 카메라와 함께했는데 지겹지 않은가.
지겹다기보다 즐거움을 느꼈다. 몸이 아프다가도 사진을 찍으면 좀 낫거든.(웃음) 그동안 내가 감당해야 할 식구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을 반드시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러니 싫으면 안 하는 거지.


그냥 사진가일 뿐, 이대로 남고 싶다


2000년에 국내 작가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사진집을 낸 후, 여전히 아프리카에서의 작품활동이 화제다. 또 다른 즐거움을 찾은 건가.
기본적으로 아프리카는 나눔이다. 아프리카 대륙이 가진 자연, 문화, 현실적인 콘텐츠가 가장 방대하고 무궁무진했다. 난 아버지로 인해 아프리카에 연고성이 있기도 하니까. 아직 우리나라는 아프리카가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열심히 가서 퍼 나르는 것이지. 사회운동은 아니지만 도울 수 있으면 도움도 주면서.

혹자들은 왜 하필 아프리카냐고 말한다. 우리나라도 나눔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글쎄, 그건 각자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각자 자신의 마음에 와 닿는 일을 하는 것이지. 우리도 어려운 환경에 처한 분들이 많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모여 큰 나눔이 된다.

지금까지의 활동을 모두 잊어달라고 했는데, 지금보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지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사회적인 일인데, 난 사회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사진가일 뿐이고 이대로 남고 싶다. 물론 그런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걸 일 년 내내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난 좀 이기적인 작가다. 왜냐하면 사진 작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니까.

지금까지 몇 작품이나 작업했나.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꼽는다면.
올해까지 40만 장쯤 작업했는데 별로 없다. 올해는 2만 장쯤 찍었는데 한 3장 정도 좋았으려나.(웃음) 그것뿐이다.

1년에 1만 장 이상을 찍는다? 도대체 사진 외의 관심사는 뭔가.
음악과 쇼핑, 문방구, CD가게, 옷가게, 잡화상, 책방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최근에는 K2에 가려고 준비 중이다. 작년 4월에 처음으로 히말라야에 올랐는데 대지에만 서있다가 높은 곳에 올라서니 굉장한 치열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심했지. 이제 나도 나이가 있으니 조만간 좀 더 작업해 놓자고. 더 있으면 실버원정대 소리 들을 거 아냐.(웃음) 

스물셋의 나이에 프랑스에서 오늘의 사진에 선정되며 일가를 이뤘다. 사진이 뭔가.
감성이다. 난 또래보다 조금 일찍 예술에 관심을 가졌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꿈이 대통령일 때 난 소설가였는데, 다른 친구들의 꿈이 왜 똑같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이 20대를 지배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느냐, 당신이 얼마나 자아를 이겨낼 수 있느냐, 결국 이겨내야 하거든. 지금? 요즘은 무지하게 나이를 느낀다.(웃음) 많은 분들이 내 나이가 쉰다섯이라면 놀라시는데 지금은 약간의 조급함이 있다. 빨리 생산하고 작업해야 한다는….
여러 곳을 다녔는데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겠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데, 영어랑 불어밖에는 못 한다. 면밀히 따지면 불어는 한 90% 방언까지 이해하는데, 영어는 한 20%정도. 절대 완벽하지 않다.
 
사진작가로서 당신의 비결이 궁금하다.
난 정말 최고가 되자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오늘 찍을 게 더 절박하다. 찍고 나서 모든 사진을 박스에 넣어 버리고 다음 작업을 한다. 전시회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요즘에는 전혀 그런 게 없어졌다. 요즘은 스튜디오 월세 내고 애 학교에 보내고 새로 산 자동차 리스나 갚고 카드 값이나 내면 된다.(웃음)

그렇다면 정말 잘 찍은 사진의 기준은 뭔가.
그건 생명력이자 영혼이다. 카메라가 기계임에도 예술성을 부여하는 건 가끔씩 영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절대 내가 원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들어가 있는…. 또 하나는 항상 꺼내 볼 수 있다는 것. 30년 전 사진 한 장이 그 시대의 영화나 소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회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게 바로 사진의 힘이다.    

 

김중만 195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971년 정부 파견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이주, 이후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77년 프랑스 ARLES 국제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작가상, 프랑스 오늘의 사진에 선정되었다. 그의 수상은 카메라를 발명한 다게르 이후 그때까지 프랑스에서 선정된 80인의 사진가 중 최연소였다. 프랑스 패션 잡지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다 1979년 귀국, 1988년 한국 국적을 회복하며 국내 최고의 인물, 패션 사진가로 손꼽히게 된다. 현재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운영하고 있다.

 
 
 
by 메시지언 | 2008/02/18 13:47 | M25 & m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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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청천 at 2008/02/28 17:24
디카보다 필름카메라가 사진 찍는 맛이 더 있는 것 같아요.
디카는 넘 많이 찍에 된다는...
Commented by starryi at 2008/03/03 19:55
이 아저씨 자유로운 영혼이 무지하게 부럽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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